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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수리-원미-남한

남한산성(2013-08-24) 산행

남한산성(2013-08-24) 산행

개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역사적 변천

1985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된 이래, 1998년부터 8차례에 걸쳐 행궁터, 인화관터, 일부 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대략적인 축성 시기와 함께 변천 과정도 파악되었다.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 등이 확인되었을 뿐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3,460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 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였음도 밝혀졌다.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李世華墓誌銘)이나『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는 것 등이 전한다. 산성 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 역시 신라 때 축성된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서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곧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였고,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남한지(南漢志)』에는 원성 성벽의 안쪽 둘레는 6,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 5곳의 옹성과 16곳의 암문, 125곳의 군포, 4곳의 장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