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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수리-원미-남한

수리산 성지 십자가의 길(최경환 성인 묘)

수리산 성지 십자가의 길(최경환 성인 묘)

 

산행지 경기도 안양시 안양3동
산행일자 : 2021년 3월 14일 (일요일) 12시
날씨 : 맑음, 날씨

 

 

행정 구역으로 분명히 안양시 안양3동, 시 중심가에서 불과 4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적한 첩첩 산중이 나선다.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산의 이름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의 섭리로 갈고 닦았던 곳이라는 뜻인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수리산이나 골배마실 골짜기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신자들 대부분이 화전이나 담배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려가야만 했다. 그러니 생활에 여유가 있을리 없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새 신자들을 환영하였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들이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신부의 방문이 있을 때면 여럿이 모은 공소전(公所錢)을 바쳐 교회 사업을 도왔으며, 아침 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곳은 모두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수리산의 회장 최경환은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태연히 그들을 맞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도록 한 뒤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묶인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는 무지한 형벌을 여러 차례 받은 뒤 그 상처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모친 마리아는 두 살짜리 막내 자식에 대한 육정(肉情, 모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이내 잘못을 뉘우친 뒤 끊어지는 육정을 억누른 채 순교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마리아는 첫 번째의 배교로 제외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린 자식 때문에 일시 배교했으나 이를 뉘우치고 순교한 사실은 오히려 조선의 전통에서 본다면 모정과 신앙을 모두 지킨 모범적인 순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복 과정에서는 마땅히 마리아를 다시 '하느님의 종'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사위 곽(郭) 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아내 고 우르술라는 동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첫 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귀국한 뒤 모친을 뵙게 된 아들 김대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김대건이 골배마실로 돌아와 모친과 함께 생활하면서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1845년 말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황해도 지방의 해로를 개척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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