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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경기도 여행

행주산성 둘레길

행주산성 둘레길

1. 산행일 : 2021.08.15(일요일)

2. 높이 : 덕양산 (124.6m)

3.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65-3

4. 등산코스/소요시간 :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대첩문~덕양산(124.6m)~행주산성~충장사~충훈정~대첩문

                             

5. 특징/볼거리 :

 

사적 제56호. 해발 124.6m의 덕양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해발 70~100m의 능선을 따라 부분적인 토축을 했는데, 그 길이는 약 1km에 이른다. 성의 남쪽은 한강이 인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가 조성되어 있다.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급경사로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산성의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990년 12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생토암반을 정리하여 성 내부 쪽에 2단의 석렬을 쌓고 성 바깥쪽에는 기둥을 세워 그 사이에 5~10m 두께의 점토와 산흙을 겹겹이 다져 쌓는 판축법에 의하여 성이 축조되었다.

 

시굴·조사의 대상인 대첩비휴게소에서 충장사에 이르는 구간의 밑바닥 부분의 너비는 6.26m, 높이 2.8m, 성벽 정상부의 너비는 2.3m가량 된다. 건물지의 존재를 시사하는 초석과 문터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벽 판축토 안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편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을 통하여 볼 때 성곽의 축조시기는 7~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권율이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행주대첩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내용

 

사적 제56호. 지정면적 361,171㎡, 둘레 약 1,000m.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안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이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으로 추측되며,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뿐이며, 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능선을 이용하여 양쪽에서 석심을 두고 판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를 찾을 수 없으나 산 중복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이른바 이중식산성은 삼국시대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주목된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수지문(手指文)의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의 전적지로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하다. 현재 성안에는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다.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벌여 권율을 모시는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하고 정자와 문도 세웠다.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대첩문

 

 

충장공 권율 도원수

 

조선 육군의 위용을 세운 행주대첩

 

권율이 수원 독성을 지키는 동안, 개전 이래 평양까지 일사천리로 진군했던 일본군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평양에서 개성으로, 또 개성에서 한양으로 퇴각을 거듭하는 형편이었다. 권율은 이 같은 전황을 파악하고 한양 수복을 노렸다. 기세등등한 일본군의 북진 의지를 차단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옮겨가 행주대첩의 위업을 달성했다.

 

1593년(선조 26) 2월, 권율은 선거이에게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정예병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친 후 책(柵)을 설치하고 방비했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 얼마 되지 않은 군사가 들어간 것을 알고 이를 가볍게 여겼다. 그들은 단숨에 성을 함락하기 위해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행주대첩의 과정을 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성,승군,의병,관군

 

 

 

대첩기념관

 

 

방화대교

 

 

계양산

 

 

복숭아

 

 

북한산

 

 

자유로,한강,마곡대교,우면산,관악산

 

 

상장능선

 

 

나한봉,상원봉,문수봉

 

 

백운봉, 만경봉,노적봉

 

 

마곡대교,가양대교

 

 

 

충의장계단을 다 올라가면 1977년 건립한 영상교육관 충의정이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행주대첩 승리'에 대한 영상을 상시상영하는데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중지했구요

 

 

자유로,한강,마곡대교,우면산,관악산

 

 

행주대첩비

 

정상의 신행주대첩비는 15.2m 높이의 석탑으로 1960년대 행주산성 성역화사업으로 건립했고

앞면에 써 있는 행주대첩비 幸州大捷碑는 박정희 대통령 글씨라고 합니다.

 

 

 

대첩비각

 

2기(基). 높이 178㎝, 너비 82㎝, 두께 18㎝.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602년(선조 35)에 설립하였다.

대리석재의 비로서 기단부는 묻혀 있다. 앞면의 상부에 약간의 균열이 있고, 측면에는 상부에서 하단까지 약 3㎝ 정도로 쪼개져 있으며, 마멸이 매우 심하여 부분적으로 수십자밖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비문은 최립(崔岦)이 짓고 한호(韓濩)가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元帥權公幸州大捷碑(원수권공행주대첩비)’ 9자를 두전(頭篆)하였다. 비음은 사위인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비문에는 막료와 사병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동기를 적고 있다. 즉, 1593년 2월 권율이 정예군 2,3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주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육박전으로 승리하고 적군의 깃발·투구·갑옷·무기 등을 노획한 혁혁한 전과를 밝히고, 권율의 가문과 같이 좋은 가문에서 비롯된 인격과 덕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밖에 없었으며 나아가 이를 기리지 않을 수 없어 비를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글씨는 해서로서 왕희지풍에 가깝게 매우 정중하고 단정하게 썼는데, 품격은 그리 높다 할 수 없으며 자가풍의 석봉체(石峰體)이다. 비음은 송설체의 것으로 역시 뛰어난 것은 아니나, 비의 전체가 마멸이 심하여 서체상의 특징이나 그 평가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