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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산/강원도 여행

강릉 허난설헌 생가

강릉 허난설헌 생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29 (초당동) 

일자 : 2021년 08월 21일 (토요일)

날씨 : 흐리고 비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엽(曄), 오빠는 봉(篈), 남동생은 균(筠)이다.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가문으로 유명한 문장가와 학자를 배출했다.

엽이 첫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 김씨(江陵金氏)광철(光轍)의 딸과 혼인해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생애와 활동사항

허난설헌은 문장가문에서 성장해 어릴 때에 오빠 봉과 동생 균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균에게 시를 가르쳤던 이달(李達)에게 한시 수업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安東) 김씨(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했으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기녀들과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비극이 연속됐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며 불우하게 살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작품세계

조선사회의 모순과 계속 닥쳐온 가정의 문제들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세상을 떠나 신선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용을 담은 시가 128수나 된다. 그만큼 신선사상에 심취했으며 삶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한문가사로는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그러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하고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견디기 어려운 세 가지 불행

그녀의 불행은 계속 꼬리를 이었다. 남편의 방탕은 조금도 쉴 줄을 몰랐다. 그리고 행복과 기쁨이 넘치던 친정집에도 풍파가 연달아 이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주에서 객사했고 이어 오라버니 허봉은 이이의 잘못을 들어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허봉은 2년 뒤 풀려나 백운산, 금강산 등지로 방랑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병이 들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금화 생창역에서 아버지처럼 객사하고 말았다.

이런 친정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고, 자신의 시재를 알아주었던 인물이 하나씩 사라지는 데 더욱 가슴이 메어졌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리하여 더욱 감상과 한에 빠졌다. 그러다가 한번은 ‘삼한(三恨)’, 곧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고 한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이라 한다.

첫째는 바로 그녀가 시재를 널리 뽐낼 수 없는 좁은 풍토를 안타까워한 것이고, 둘째는 남성으로 태어나 마음껏 삶을 노래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셋째는 그녀의 남편이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더욱 방탕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녀는 스물세 살에 어머니의 초상을 당해 친정에 가 있을 때 꿈을 꾸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저 신선 사는 곳에 올라 노닐면서 온갖 구경을 다 하다가 한 줄기 붉은 꽃이 구름을 따라 날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꿈에서 깨자 곧 “붉은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가 차가운 달에 떨어졌네”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자신의 죽음을 두고 읊조린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고, 그 죽음의 형상은 곧 신선의 세계였다. 그녀는 많은 한과 원망을 가슴 가득히 안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죽음은 분명 슬픈 것이었고 한 천재의 한 어린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이에 허균은 이렇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