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의 산/북한산-수락산

겨울 북한산(족두리봉-향로봉-비봉) 둘레길

겨울 북한산(족두리봉-향로봉-비봉) 둘레길

1. 산행일 : 2022.02.05 (토요일) 맑음

2. 높이 : 북한산 족두리봉(370m) 향로봉(535m) 비봉(560m)

3. 위치 : 서울특별시 강북구·도봉구·성북구·은평구·종로구, 경기도 고양시·양주시·의정부시

4. 등산코스/소요시간 : 독바위역-족두리봉-향로봉-비봉-사모바위-승가사-북한산 구기탐방지원센터 

                              (8.73Km 3시간 37분)

 

5. 특징/볼거리 :

 

족두리봉-향로봉-비봉-사모바위

거대한 바위의 족두리봉에 올라서면 조망이 장관이다. 가까이 향로봉과 비봉, 문수봉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의상능선, 백운봉까지 멀리 시야에 들어온다. 족두리봉에서 보는 향로봉은 비봉능선에 보는 것과 달리 거대한 암릉이다. 족두리봉에서 완만한 능선을 타고 향로봉 아래에 이르면 위험구간,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향로봉에서 비봉능선 구간은 완만하다. 비봉능선에는 진흥순수비가 정상에 있던 비봉과 사모바위가 있다. 문수봉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의상능선의 암릉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마치 북한산이 온통 바위인 암산 같은 경관이 장관이다.

비봉에서 문수봉 암릉까지는 완만한 능선, 문수봉을 오르는 암릉 아래 위험구간 우회표지가 있는 지점에서 우회한다. 왼쪽으로 우회하면 계곡의 상단부, 돌이 많은 등산로이다. 가파르게 올라 능선 안부의 청수동암문으로 올라선다.

하산은 여러갈래다. 비봉능선중간에서 삼천사계곡, 승가사로 하거나, 문수봉부근의 청수동암문에서 의상능선을타고 북한산성탐방지원세터, 대남문에서 구기계곡을 타고 하산할 수 있다.

 

비봉(560m)능선 코스

 

비봉능선은 백운대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이 문수봉에서 의상능선과 비봉능선으로 갈라지는데 비봉능선은 문수봉에서 족두리봉까지 이어진다. 비봉능선에는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족두리봉이 있다.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가 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 유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으며 비봉에는 복사본이 설치되어 있다.·

비봉능선의 사모바위 -사랑하는 여인을 애틋하게 기다리다 바위가된 남자사모바위의 전설


조선 인조 임금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자가 전쟁터로 갔다가 다행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오니 사랑하는 여인이 청나라로 갔다. 남자는 여인이 풀려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여인들은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풀려났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산 자락 지금의 홍은동 지역에 모여 살았다. 남자는 여인을 찾으려고 그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북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고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구기동 쪽에서 사모바위를 보면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독바위역

 

 

족두리봉

 

 

족두리봉(370m)

 

 

향로봉(535m)

 

 

북한산

 

 

북한산(백운대)

 

 

만경대,노적봉

 

 

노고산,개명산

 

 

북한산 삼각점봉

 

 

보현봉

 

 

남장대, 문수봉, 횃불바위 또는 연꽃바위

 

 

향로봉(535m)

 

 

비봉(560m)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의 비봉 정상에 있던 신라 진흥왕이 새로 넓힌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세운 비석. 1972년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1816년 김정희에 의해 조사된 적이 있다. 비문은 제기·기사·수가인명·영사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553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역을 탈취하고,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승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후, 555년에 직접 북한산주를 순행하여 '척정봉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모바위

 

종로구 구기동 승가사 뒤에 있는 바위로서, 모양이 사모같이 생긴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승가사

 

 

고려 보물 제215호756년 마애여래좌상

 

높고 큼직한 살상투[肉髻]를 갖춘 머리는 민머리[素髮]이며, 백호공(白毫孔)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네모꼴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게 처리된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꾹 다물고 있는 입, 가늘게 내려 뜬 눈과 눈썹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졌다. 목에는 가는 선으로 조각된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왼쪽 어깨에 걸쳐 입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는 넓은 옷깃이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 선은 유려하고 활달하다. 그러나 형식화된 각진 어깨와 밋밋한 가슴 등은 입체감이 결여되어 있다.

팔을 약간 벌려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당당한 불격(佛格)을 나타내 준다. 뿐만 아니라 오른쪽 손목을 안쪽으로 꺾이게 함으로써 율동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화사한 중판연화문대좌(重瓣蓮花文臺座) 위에서 가부좌한 양 무릎은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손 밑의 발은 호화로운 연꽃대좌와는 대조적으로 탄력성을 잃어버린 채 손과 같이 큼직하게 조각되었다.

대좌로부터 시작되는 광배는 굵은 선으로 아무런 장식 없이 조각된 키 모양의 거신광(擧身光)이다. 머리 위에는 개석(蓋石) 아랫면에 연꽃잎과 자방이 아름답게 조각된 팔각형의 다른 돌을 바위에 붙여서 보개(寶蓋)로 삼고 있다. 머리 위쪽 좌우와 양어깨 옆으로 파여 있는 네모꼴의 구멍은 목조전실(木造前室)의 가구(架構) 흔적으로서 마애석굴(磨崖石窟)을 모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당당한 체구에 장중하고 단정하면서도 자비가 넘쳐흐르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상들보다는 다소 둔화되고 형식화된 감이 있다. 하지만 신체 표현은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으며, 얼굴 표정 또한 부드러움과 자비로움이 잘 간직되어 있는 10세기의 고려시대 불상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마애불상과 유사한 상으로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좌상(大興寺北彌勒庵磨崖佛坐像)과 월출산 마애불좌상(月出山磨崖佛坐像)을 꼽을 수 있으며 고려초에 조성된 마애거불상의 하나로 생각된다.

 

 

 

고려 보물 제1000호 석조승가대사좌상

 

보물 제1000호. 불상 높이 76㎝, 광배(光背) 높이 130㎝. 승가굴은 삼국시대부터 불승들이 수도하던 석굴로서 이 석굴 안에 석상(石像) 1구가 봉안되어 있다. 「승가사중수기(僧伽寺重修記)」에 따르면 승가대사(僧伽大師)의 상으로 추정된다. 인도의 고승으로 당나라에 와서 전도에 전념하여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까지 추앙받았던 승가대사를 돌로 형상화하여 석굴에 봉안, 신앙하였던 것이다.

 

화려한 광배를 등에 진 이 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등신대(等身大)의 좌상이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광대뼈가 튀어나와 전형적인 시골 할머니 같은 인상으로 지방화가 짙게 보인다. 상체도 사각형에 가깝고 평판적이며 상체에 비해서 하체의 무릎이 유난히 넓어 고려 초기의 철불(鐵佛)들과 유사한 형식을 보여준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하여 지물(持物)을 쥔 모양이고, 왼손은 소맷자락 속에 감추고 있다. 통견의 가사(袈裟) 옷주름 선은 굵으면서 간결한 것으로, 당시의 불의(佛衣)의 옷주름 선과 비슷한 경향을 나타낸다.

광배는 상에 비해서 훨씬 거대한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로서, 중간 아래는 원형을 형성하여 신라시대의 주형거신광배와는 다소 다르다. 머리 뒤의 두광(頭光)에는 연화문(蓮華文)을 두르고 이 주위를 당초문과 모란문(牧丹文)을 새겼으며, 신광에도 당초·보상화문을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거신광(擧身光)의 테두리[外緣]에는 전체적으로 불꽃무늬를 새겨 신라의 광배와 비슷하다. 하지만 비교적 정교하고 화려한 무늬의 조각 수법은 고려 특유의 궁정 취향을 잘 나타내고 있어서 당대의 우수한 작품임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