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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경기도 여행

김포 조선장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7-08-06)

김포 조선장릉(章陵)[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7-08-06)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성산의 나지막한 산기슭에 규모가 작은 쌍분의 왕릉이 있으니 곧 사적 202호로 지정된 장릉(章陵)이다. 장릉은 조선조 인조(仁祖)의 아버지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원종(元宗)과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의 무덤이다. 능역에는 늙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울창하고 연꽃이 예쁘게 핀 연못이 있으며 또한 마름과 수련이 가득한 저수지가 있어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하지만 추존왕의 무덤이라서 그럴까?

다른 왕릉과는 달리 찾는 사람들이 적어 꽤나 한적하다.

왕릉 입구에 있는 재실을 둘러보고 숲길을 걸어가다 보면 늙은 소나무 숲 뒤로 욍릉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나타나고 그 뒤 낮은 언덕배기에 정자각과 함께 장릉이 자리하고 있다.

 

장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분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고 봉분 아래로 호석만 둘렀는데 이는 추존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각 능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상석 좌우로 망주석 1쌍이 있다.

또한 봉분 주위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그리고 봉분 아랫단에는 문인석과 석마(石馬) 각 1쌍과 장명등이 있고, 그 아래에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있다.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비각에 영조 29년(1753)에 세운 ‘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祔左(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라고 새긴 비석이 있으며, 그 옆에 육경원 자리에 묻혀 있던 비석 밭침돌을 옮겨놓았다.

 

기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정원군은 선조(宣祖)의 5번째 아들로 광해군과는 이복형제 간이다.

정원군은 죽어 남양주에 묻혔으며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인조 원년(1622년)에

대원군에 봉해지면서 흥경원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뒤 현 위치로 이장했고, 인조 10년에 대원군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원종이라는 묘호(廟號)와  함께 장릉(章陵)이라는 능호를 받게 되었다.

 한편 정원군의 부인이자 인조의 생모인 구씨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부부인(府夫人)에 봉해졌다가

 죽어 장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묻혔는데 육경원이라는 원호를 받았다가 1년 뒤 정원군 옆에 이장되었다.

 

정원군은 비록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지만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이복형제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을 보면서 늘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다.

 그리고 생전에 그의 둘째 아들인 능창군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죽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광해군이 이복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시킨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오르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부인 유씨와 더불어 그의 아들인 이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폐세자인 이지가 유배처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인조의 명으로 사사(賜死)되었으니 결국 피장파장이 아니겠는가.

 

무릇 정권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최근 북한의 예에서 보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권이 바뀌었을 땐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되어 있다.

골육상쟁(骨肉相爭)! 아무리 부모형제지간이라도 정적으로 간주될 땐 무자비하게 제거해버리는 것이 권력의 생리이다.

 정원군은 아들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뒤 눈을 감을 때까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능양군 또한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늘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죽은 뒤 능양군이 왕이 되어 자신을 왕으로 추존할지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죽은 뒤의 영화가 무슨 소용이랴.

장릉 숲길을 거니는데 정원군의 넋을 위로하듯 뻐꾸기가 구성지게 울고 있었다.

 

[출처] 김포 장릉(章陵)|작성자 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