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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경기도 여행

수원화성-화성행궁(2016-11-19)

수원화성(水原華城)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줄곧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수원시로 불리고 있다.

수원부를 옮기고 정조 17년(1793)부터 화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해 2년 반 만인 1796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는 당초 정약용이 생각했던 4㎞보다 늘어난 5.4㎞ 정도이다.

성곽 시설에서도 적대나 누조, 공심돈, 포루 등과 같이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설이 많이 도입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6m 정도이고 성벽 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여장을 두고 여장에는 총안을 뚫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규형(圭形) 쌓기를 기본으로 했다. 성벽에는 4개의 성문을 두었고 암문 5개를 설치해 통행토록 하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행궁이 자리 잡았다. 화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쪽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펼쳐진다.

화성을 비롯해 우리나라 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불규칙한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가 있는데 북문이 장안문이고 반대 남쪽이 팔달문이다.

동서에 청룡문과 화서문이 있다. 남북문은 중층문루로서 도성문루에 버금가는 규모와 형태를 갖고 있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행하고 양식을 나르는 통로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개 벽돌을 많이 사용했고 원여장 등의 특수한 장식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암문에는 보통 건물을 세우지 않지만 서남암문에만 예외적으로 포사를 설치했다.

이외에도 수문 2곳, 적대 4곳, 노대 2곳, 공심돈 3곳, 봉돈 1곳, 치성 8곳, 포루 10곳, 장대 2곳, 각루 4곳, 포사3곳 등의 시설이 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은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정면 중앙에는 약간 안으로 들여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중축 선상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봉수당 서북쪽으로는 모서리끼리 연결된 장락당(長樂堂)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침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장락당 정면에는 경룡관이라는 누각 형식의 삼문이 있다. 장락당 향좌측의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5량 18칸 건물이다.

 복내당 앞에는 유여택(維與宅)이라는 5량가의 8칸 건물이 있다. 정당 향우측에는 초창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있다.

낙남헌은 본래 읍치의 득중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 규모는 7량가로 14.5칸이고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행궁 앞으로는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신풍루 향좌측에는 외정리소,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등이 있고 향우측에는 집사청, 북군영, 우화관 등이 있다. 원래 읍치 건물에는 남북 군영과 비장청, 무기고 등이 있고 나머지 외정리소, 서리청, 집사청 등은 성곽 축조 때 지은 것들이다.

1874년(고종 11)에는 2만 냥을 들여 행궁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까지도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구한 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1910년 세워지면서 행궁 일부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신풍루 뒤로 좌익문이 보이고 중양문과 유여택, 정당인 봉수당과 장락당, 내당인 복내당 등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건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면서 크게 증축되었고 수원 농업시험소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고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부근에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낙남헌 건물이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는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복원공사가 완공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동이포루

 

 

 

동남각루

 

 

 

봉돈

 

 

 

 

 

창룡문

 

 

 

 

 

 

 

 

 

 

 

 

 

 

 

 

 

 

 

 

 

동북공심돈

 

 

 

동장대(연무대)

 

 

 

 

 

동북포루

 

 

 

 

 

 

 

 

 

북암문

 

 

 

 

 

 

 

동북각루

 

 

 

 

 

 

 

 

 

 

 

 

 

 

 

 

 

화홍문

 

 

 

 

 

 

 

 

 

 

 

 

 

 

 

 

 

 

 

 

 

 

 

 

 

 

 

장안문

 

 

 

서북각루

 

 

 

 

 

서장대(화성장대)

 

 

 

 

 

성신사

 

 

 

팔달문

 

 

 

 

 

서남각루

 

 

 

서남암문

 

 

 

서포루

 

 

 

효원의 종

 

 

 

 

 

 

 

 

 

화성행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