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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산/계양산-월미산

춘설 계양산 산행(2024-02-06)

춘설 계양산 산행

1. 산행일 : 2024.02.06(화요일)

2. 높이 : 계양산(395m)

3. 위치 :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4. 등산코스/소요시간 : 계양역→피고개→계양산정상→하느재고개→계양산성→계양역 

5. 특징/볼거리 :

‘킬리만자로는 해발 1만9710피트 높이의 눈 덮인 산이라, 아프리카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 일컬어진다. 서쪽 정상(頂上)은 … ‘신의 집’이라 불린다. 서쪽 정상 가까이 건조하고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하나 있다. 그 표범이 그렇게 높은 곳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 헤밍웨이

내가 태어난 곳은 산 높고 물 맑은 깊은 산간 마을이었다. 소년 시절, 해가 뜨면 개울가로 나가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철마산(鐵馬山)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북쪽으로 멀리 보이는 자줏빛 뒷산은 높고 험해 해가 지면 어둡고 어두웠다. 그러나 이 높은 산들은 무수한 전설을 지니고 있어, 볼 때마다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찾고 싶었다.

나는 십 리 밖 읍내에 있는 과수원 옆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바람 불던 어느 봄날 학교가 일찍 파하자 머리 위로 높이 솟은 철마산을 넘기로 하고 검푸른 산을 치달아 올랐다.

칡넝쿨이 얽힌 덤불숲을 헤치고 나오니 찬란한 태양 아래 수많은 청석바위가 산협(山峽)을 이루고 있었고, 담쟁이 모양의 덩굴 식물들이 여기저기 푸른 손을 뻗치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마른 이끼가 낀 검은 돌밭을 지나 올라갔을 때, 맑은 연두색으로 물든 고산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목초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낮은 산에서는 볼 수 없는 키 작은 싸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작은 풀숲 아래 가장자리에는 보랏빛 도라지꽃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보였다. 눈부시게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큰 바위 얼굴을 하고 가파른 절벽으로 우뚝 솟은 산정(山頂)은 철마(鐵馬)를 숨기고 있기 때문인지, 너무 험난해서 쉽게 접근을 할 수 없었다.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마침내 산봉우리에 올라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산을 내려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마을에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비에 가득 찬 철마산, 그 태산준령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전설의 땅인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고산식물이 자라고 노루들이 뛰어다니며 노니는 맑고 깨끗한 땅이었다. 산꼭대기에 오른 나는 그 옛날 어느 장수가 타고 다녔다던 철마를 발견할 수 없어 실망했다. 하지만 산정 부근에서 경이로움에 가득 차서 바라보았던 고산식물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청초한 모습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무나 쉽게 올라갈 수 없는 그렇게 놓은 곳에서 영겁의 세월 동안 산과 함께 고독을 이기고 의연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때 이래 내 기억 먼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 높은 산 위의 고산식물들이 산 아래서 자라는 식물보다 훨씬 더 곧고 바르며 청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그 무서운 고독을 높은 산(山)이 침묵으로 이기며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소년기에 내 고향의 푸른 하늘 아래 높이 솟은 철마산에 올랐던 경험이 내가 삶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도덕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성년이 되어 정지용의 시를 읽으면서 더욱 절실히 느꼈다.

정지용은 그의 시집 ‘백록담(白鹿潭)’에서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고독 속의 견인력으로 승화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지용은 한라 산정은 풀도 살지 않는 돌산으로 비바람 속에서 영겁의 세월을 안고 있지만 얼음처럼 ‘낭낭’하다고 말했는가 하면, ‘한 덩이’ 돌처럼 서 있는 산정은 죽은 것이 아니라 그 무서운 고독 속에서도 온갖 아픔과 시름을 이겨내면서 고요한 숨결로 ‘흰 시울’을 소리 없이 내리게 하고, 산허리에 있는 절벽을 ‘진달래꽃 그림자’로 붉게 물들인다고 노래했다. 그가 생(生)에 비유할 수 있는 산을 견인력으로 오를 때 눈앞에 열리는 명징한 깨달음의 인식 세계는, 백록담의 맑은 물, 산을 오를수록 꽃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뻐꾹채 꽃’ ‘암고란 환약 같은 열매’ ‘훨훨 옷을 벗은 백화(白樺)’, 풍란의 향기, 사람과 가까이하는 ‘해발 육천 척’ 위의 망아지와 송아지, 그리고 착하디착한 어미 소의 모습, 이마를 시리게 한 먼 산정의 ‘춘설(春雪)’, 눈 속에서 ‘인동차(忍冬茶)’를 마시며 겨울을 보내는 노인, 산을 찾아간 사람의 변신인 듯한 ‘호랑나비’ 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눈 덮인 산정이나 백록담같이 맑은 물이 있고 청초하고 우아한 고산식물들이 자라는 고원(高原) 지대는 남다른 용기와 견인력을 가지고 그곳으로 오르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어 있고, 더러움에 오염된 사람들에게는 금지된 땅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리라. 낮은 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며 높은 산을 단순히 무섭고 신비로운 곳으로만 생각하고 힘들여 오르기를 싫어하거나 거부한다면, 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숭고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산은 땀 흘리며 오르는 사람들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소년 시절 내가 고향 땅에 서 있는 그 높고 큰 철마산 고원 지대에서 보았던 경이로운 풍경이, 삶의 인식 과정에서 발견하는 도덕적 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러나 저문 강가에 서 있는 지금 그 산이 왜 나를 불렀었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산이 내게 고난과 시련을 겪고 산정에 오르면 산 아래 들판 풍경과 다른, 눈이 시리도록 신선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