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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산/인왕-북악-남산

인왕산 (소박한 믿음이 담긴 우리 민속신앙) 탐방

인왕산 (소박한 믿음이 담긴 우리 민속신앙) 탐방 

1. 산행일 : 2021.11.17(수요일)

2. 높이 : 인왕산(338m)

3.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에 있는 산.

4. 등산코스/소요시간 : 독립문역-무악동마애불-수성동마애산상-호랑이동상-석굴암,미륵존불-인왕산 정상-인왕천약수터-수성동계곡-항학정-단군성전-경복궁역

 

5. 특징/볼거리 :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가 내건 미끼 중 하나는 조선을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시켜주겠다는 사탕발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극복해야 할 문화로 매도하고, 민속 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해 타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돼버렸다.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왜곡은 현재까지도 온전히 바로잡히지 않았고, 잔재 또한 깨끗이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무형의 유산’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일상,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의식세계와도 깊게 관계되어지는 만큼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강제로 빼앗긴 문화원형을 복원하고, 되찾는 일이야말로 일제잔재 청산의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일제강점기 국가 제사의 축소와 변질

 

‘순종황제실록’에 따르면 1908년 7월 23일 국가 제례는 ▲제실(帝室)과 관련이 있어야 하며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제사는 영원히 폐지하고 ▲합사하는 것이 옳은 묘사전궁(廟社殿宮)은 옮길 장소를 찾아 봉안토록 하고 ▲대제(大祭), 별제(別祭), 속제(俗祭), 삭망제(朔望祭)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생략하고 ▲신당(神堂), 아일(衙日), 고사(告祀)와 같은 것은 폐지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각종 제사의 규모와 횟수는 축소되고, 상당수의 제사는 폐지됐다. 조선의 왕족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왕실 봉작제에 편입시켜 종묘제례는 이어졌지만,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26년 순종이 승하, 1928년 종묘에 부묘된 이래 종묘는 조선왕조의 상징성을 상실한 채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 제례 공간은 자연스레 의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고, 일본 천황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조선 신궁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일제는 1898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던 왜성대(倭城臺)에 대신궁(大神宮)을 세웠으며, 1908년 남산에 한양공원을 조성하고, 1912년 조선신사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거쳐 1920년 5월 기공식, 1925년 10월 준공식을 치렀다.

 

이때 남산 중턱에 있던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졌고, 남산은 일본의 국조대신(國祖大神)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위한 제례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전통 유교 교육의 본산인 성균관의 경우 1911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가 경학원으로 개칭하면서 교육 기능을 없애고 문묘 석전 의례만을 유지시켰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성균관과 향교는 교육기관의 역할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겨진 상태였고, 교육 기능이 없는 제사 기능은 후손이 끊긴 제사나 다름 없었다.

 

결국 문묘 대성전은 일제가 전국 향교를 통제하고 간섭하는 공식 통로가 됐으며, 조선인들에 대한 황국식민화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이용됐다.

 

그런가 하면, 관왕묘와 성황제 등 국가 차원의 공적 국행의례를 민간 지역의례로 바꿔 마을 제사로 전락시켰다. 마을굿의 형태로 진행되던 민간의 동제도 규제하면서 간단한 고사나 치성으로만 할 수 있게 했고, 도당굿은 도당제로 변했다.

 

 

 

 

 

 

 

 

관음사 민불

 

선바위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져 동네 안쪽의 골목길로 접어들면 [무악공원150m>>]라는 둥근 표지판이 보인다. 인왕산 남미륵은 무악공원까지 가기 전에 만날 수 있다. 자연석의 바위를 슬쩍 파고 들어간 다음 기존 바위의 굴곡을 이용하여 결가부좌 형태의 석불을 조성하였는데, 완고하달까 무표정한 얼굴에 아랫배도 살짝 나와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 마애불 역시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근래에 조성된 듯 싶다

 

 

인왕산 호랑이동상

 

 

수성동 계곡

 

 

수성동계곡 마애산신상

 

마애산신상인 것 같은데 남녀가 같이 있다.  들고 있는 것은 방울인가?

 

 

삼신할머니는 의자에 앚아 있는 모습이다.

산신할아버지가 깔고 앚은 호랑이의 꼬리가 두드러진다.

 

 

마애산신상, 동자와 호랑이가 있다.

꽃을 들고 있다.

 

 

바위에 새긴 산신도가 있다.

 

 

선각으로 새겼고 지팡이를 세우고 앉아 있는 산신 옆에 호랑이가 누워있다.

 

 

위쪽의 바위에는 마애미륵상이 있다.

감실형태로 다듬어 선각으로 연꽃위에 앉은 불상이다.

 

 

 

조잡한 솜씨로 세운 금불상이 있어 기도처로 이용한 것 같다.

 

 

 

치마바위

애절한 전설의 현장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 중종과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정치가 문제였다. 중종을 왕위에 앉힌 자들은 자신들이 살해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의 보복이 두려워서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경왕후를 폐위시켰다. 왕후는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옛 거처로 쫓겨났다. 단경왕후는 궁을 나오면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두겠다는 약속을 중종에게 남겼고, 이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 아침이면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고 저녁이면 걷는 일을 51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중종 또한 부인을 잊지 못해 경회루에 올라 부인이 있는 인왕산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전해지는 슬프고도 애잔한 전설은 단순히 큰 바위로만 보일 수 있는 치마바위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멀리서 보면 모양이 치마처럼 보이는데, 바위에 올라서면 서울이 한눈에 보인다. 경치를 감상하기에는 그야말로 제격이다.

 

 

인왕산 치마바위 각서 흔적

 

첫째줄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둘째줄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九月十六日(황기2599년 9월 16일)

셋째줄:朝鮮總督南次郞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네째줄 : 작은 글씨로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기념각자를 남기는 연유를 서술한 내용이 잔뜩 새겨져 있었으며, 그 말미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토키사부로

(鹽原時三郞)'라고 새겨져 있다.

 

 

1915년 일제의 식민정책 홍보를 위해 '시정오년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함으로써 궁궐전각은 파괴되기 시작하였고, 1926년 급기야 거대한 총독부건물을 세워 경복궁을덮고 말았다. 또 총독부 전면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워 우리민족의 정기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9년 가을 경성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치마바위 위에 기념하는 글씨를 새긴 것이다.

 

 

 

인왕산 석굴암

 

 

인왕산 석굴암 마애산신단 현재 산신단 화재로 소실됨(2020.02)

 

 

 

 

인왕산 석굴암,천향암

 

 

석굴암 마애미륵존불

 

 

석굴암 마애산신상 산신 할아버지.

전문가 들의 말에 의하면 산신은 삼국 시대부터 민중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산신도는 19세기 초부터 본격 등장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크게 발달했던 것으로 알려졌 있습니다.

 

 

 

인왕산 치마바위 장희빈 기도터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 중종과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정치가 문제였다. 중종을 왕위에 앉힌 자들은 자신들이 살해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의 보복이 두려워서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경왕후를 폐위시켰다. 왕후는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옛 거처로 쫓겨났다. 단경왕후는 궁을 나오면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두겠다는 약속을 중종에게 남겼고, 이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 아침이면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고 저녁이면 걷는 일을 51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중종 또한 부인을 잊지 못해 경회루에 올라 부인이 있는 인왕산을 바라보았다고 한다.